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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판전
우편배달부: A님께 본문
2019년 2월 20일 발간된 포스텍 소통과 공론 연구소 웹진 〈소통과 공론〉 VOL.01 기고문입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이며, 이름은 A로 바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온난화 때문인지 A님의 진심 어린 편지 덕분인지 올겨울은 유난히 따뜻한 느낌입니다. 새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는데, 계획하신 일들 잘되어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지금 주고받는 이 짧은 편지들도 저에게나 A님께나 올해의 의미 있는 일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먼저 편지를 달라고 제안 드렸을 때부터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실지, 어떤 걸 궁금해하실지 마음 졸이면서 말입니다. A님께서 저와의 짧은 만남에서 어려움, 아쉬움을 느끼셨다니 의외였어요. 아무래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과 정돈된 글을 주고받는 데서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다른 탓인가 봅니다.
A님께서 말을 고르기 어려우셨거나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모르셨다면 그건 우리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성소수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A님과 대면한 셈이니까요. 그러나 개인 간의 소통은 보통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A님도 이미 일상적으로 성소수자를 만나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소통하고 계실 겁니다.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으니 말입니다. 상대가 성소수자라고 특별한 이야기를 하거나 특별한 어휘를 고를 필요는 없어요. 정말 배제적인 언어라면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며, 그건 누구와의 대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에 다시 뵙게 된다면 공통의 취미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요. 둘 다 봤던 영화나 책에 관해 이야기해도 좋고요.
아니면 A님 자신의 얘길 먼저 해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A님께서는 본인이 성소수자가 아니라고 확신하시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근의 퀴어 이론은 기존의 LGBT로 대표되는 정체성 구별을 넘어서서 더 포용적이고 다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맨틱 지향(romantic orientation) 담론이 성적 끌림을 느끼는 대상과 연애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아니면 본인이 특정 성에 끌린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성별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회는 성적 행위, 연애, 결혼뿐만 아니라 소비하는 콘텐츠, 입는 옷 하나하나까지 규범화하여 개개인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거대한 연극 같기도 하고, 한 LINQ 회원의 말처럼 과한 묶음 상품 같기도 합니다. 이 규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모두가 성소수자인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 비추어 A님 자신의 끌림, 욕망에 대해 돌아보고 대화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을 사회 규범에 기대지 않고 이해하길 두려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진심으로 가엾게 생각합니다. 많은 분과 대화해보면 알 수 있듯이, 옳다고 믿는 것이 확고해서 더 이상 열린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를 설득할 생각도 없고,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분들이 무슨 말을 하건 우리는 매일같이 중대한 걸음을 내디디고 있고, 단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 한걸음에 A님께서 같이 고민하고 대화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이 공개된 지면에서 그치는 일은 없겠지요. 그럼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뵐 날을 기대합니다. 그때까지 몸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