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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따뜻한 교훈을, 수학적으로

스님✨️ 2022. 11. 5. 12:15

이 글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를 관람한 분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쓰였습니다.

 

다중우주(multiverse) 여행의 시초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있다. 유클리드가 제시한 다섯 가지 공리 중 마지막 평행선 공리[각주:1]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수학자들은, 어느 맑은 날 오후, 직선 밖의 점을 지나고 그 직선을 만나지 않는 직선이 없거나 무수히 많은 우주를 상상했다. 그건 엉덩이에 이달의 조사관 상을 꽂는 것만큼이나 엉뚱한 일이었고, 그들은 실제로 그러한 우주들을 발견한다. 소위 구면 기하와 쌍곡 기하가 그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다른 네 공리가 참이더라도, 평행선 공리가 반드시 참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Parallel postulate, Wikipedia.

 

여기서 공리(axiom)는 다중우주 여행의 목적지를 제한하는 설정 값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핫도그인 건 좀 아닌 거 같아.. 하는 생각이 들 땐, “손가락이 핫도그는 아님” 이라는 문장을 입력한다. 그러면 무한히 많은 가능성의 우주들 중 손가락이 핫도그인 우주들이 배제된다. (보통은 “임의의 x에 대해 x=x이다.” 같은 재미없는 문장[각주:2]을 입력하는 관습이 있다.) 이렇게 수학자들은 공리 목록에 어떤 것은 넣어보고, 어떤 것은 또 빼보며 여러 우주를 여행했다. 자연수에 사칙연산이 가능한 무한대가 포함된 우주, 미적분에 사용되는 무한소가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 등등..[각주:3]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수학자들에게 그것은 우리가 증명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괴델(K. Gödel, 1906 ~ 1978)은 다음과 같은 관찰을 했다: 공리 목록을 적어놓고, 그걸로 갈 수 있는 모든 우주를 여행했을 때 항상 참인 명제가 있다면, 그 명제는 처음에 정한 공리 목록으로부터 반드시 증명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괴델의 완전성(completeness) 정리이다. 에블린은 그 무수히 많은 우주를 통해 조이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낸 것일까? 수학적으로? 아마도..?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공리 목록을 늘리면 늘릴수록, 증명 가능한 명제는 많아지고 그 반대급부로 여행할 수 있는 우주는 적어진다. 일찍이 무한한 우주를 여행한 조부(祖父) 힐베르트 투바키 선생[각주:4]은 어느 날 너무 무료한 나머지 커피 잔과 위상동형인 베이글 위에 공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그것이 거짓인 우주들이 스러져갔다. 이것은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었는데, 공리 목록이 지나치게 커지는 순간, 모든 명제가 증명 가능해지고 (손가락이 핫도그는 아님. 근데 핫도그임. 이런 것까지.) 모든 우주가 베이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https://www.danamackenzie.com/blog/?p=2501

 

조부와 그의 추종자들이 실험하려고 했던 것은 이랬다. 딱, ‘우리’ 우주만 남을 때까지 공리 목록을 키울 수 있을까? 지금의 공리계는 썩었다. 자연수보다 크고 실수보다 작은 집합이 있는 우주도 있고 없는 우주도 있는 게 말이 되냐?[각주:5] ‘우리’ 우주에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의미를 포기하고 형식의 완전함만을 추구하자[각주:6]는 일견 허무주의적인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가 진정 바란 것은 ‘우리’ 우주만이 유일무이한 의미를 가지며 수학은 그 우주에 대한 영원불멸한 진리의 담지자라는 소박한 확신이었다.

 

 

이 계획을 위해 조부가 설정한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베이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공리 목록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것. 둘째, 아무 명제나 들이밀었을 때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있는 알고리즘. 이 계획이 성공해도 실업자가 될 위험에 처한 수학자들은 더 크고 선한 의지로 무한한 다중우주의 운명을 위해 악과 싸울 것을 맹세하게 된다.

끝내 조부를 멈춘 괴델이 밝혀낸 것은 다음과 같다. 유의미한 크기[각주:7]의 공리 목록으로는, ‘우리’ 우주에서 참이지만 증명하지 못하는 명제가 반드시 생긴다. 다시 말해서 베이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 아니라면, 두 개 이상의 우주(그 명제가 참인 우주와 거짓인 우주)를 여행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 명제를 다시 공리에 추가하면? 또 다른 명제가 반드시 말썽을 부린다. ‘우리’ 우주가 특별한 점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 우주를 특정할 방법도 없다. 그러므로 공리 목록의 무모순성을 그 목록으로부터 증명할 방법도 없다. 이것이 바로 괴델의 불완전성(incompleteness) 정리이다. 쥬쥬 츄바카의 두 번째 계획인 알고리즘 또한 튜링(A. Turing, 1912 ~ 1954)이 비슷한 방법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각주:8]

 

Carnielli, Walter Alexandre and David Fuenmayor. "Godel blooming: the Incompleteness Theorems from a paraconsistent perspective." (2020).

 

그렇게 수학자들은 직업을 지켜냈고, 그 대신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Nothing matters)’는 냉혹한 교훈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버렸다. 일생을 바친 가설이 사실은 애초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지금 사용하는 공리계에 모순이 발견되어 모든 증명이 허접한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우주가 전혀 특별하지 않고, 우리가 영원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지금 정리가 증명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따뜻한 교훈을, 증명해냈다. 수학적으로.

 

 

어린 시절 나는, 마치 베이글 보여주려고 쫓아다니는 조이처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같이 보러 가자고 모친께 조르는 사람들 마냥[각주:9], 부친께 괴델이 다중우주를 지켜낸 모험담을 열띠게 설명했더랬다. 이건 인간 지성 최고의 성취이자 유일한 성취라고. 그러자 부친의 반응은 이랬다. “수학자들은 당연한 진리를 그렇게 어렵게 증명해야 아느냐”라고. 그러게, 수학자들은 모든 문제를 비비 꼬아서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다만 그 말씀을 다중우주를 두 바퀴는 여행하고 오셔야 게이와 트랜스젠더 정도는 구별할 거 같은 분이 하셔서 조금 우습긴 한데.

 

  1. 직선 밖의 점을 지나고 그 직선을 만나지 않는 직선은 하나뿐이다. [본문으로]
  2. 페아노 공리계(Peano's axioms)의 첫 번째 공리. [본문으로]
  3. 여기서 '우주'를 수리논리학의 한 분야인 모형 이론(Model Theory)에서는 모형이라고 부른다. 예시로 언급된 우주들은 각각 자연수 체계의 비표준 모형, 비표준 해석학(nonstandard analysis) 등을 참고. [본문으로]
  4. 힐베르트(D. Hilbert, 1862 ~ 1943)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본문으로]
  5. 연속체 가설(continuum hypothesis). [본문으로]
  6. 다비드 힐베르트, 박세희 역, 「무한에 관하여」, 『수학의 철학』, 아카넷, 2002, 300-301쪽. [본문으로]
  7. 여기서 유의미한 크기라는 것은 무한히 많아도 좋지만 최소한 어떤 명제를 봤을 때 어? 쟤 공린데? 하고 알아볼 수 있는 알고리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8. 결정 문제(decision problem). [본문으로]
  9. https://twitter.com/ss_wandya/status/1586884570443845632?t=OgA9SDHN8O3qJIXVAr1u8A (2022-11-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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